#명품 #샤넬
사랑하는 애인에게 선물을 한 가지 준다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물론 예쁜 꽃, 맛있는 음식이나 편지와 같은 선물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본인이 돈을 원하는 만큼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선물 중 하나가 바로 명품일 것입니다. 명품은 ‘가격’이라는 부담만 제거되면 디자인이나 질적인 면에서 아주 뛰어나기에 남녀 상관없이 대부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은 수많은 명품 브랜드 중 가장 파급력이 높은 것 중 하나인 ‘샤넬(Chanel)’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샤넬(CHANEL)의 역사

샤넬(CHANEL)을 만든 창업자는 샤넬(Chanel)입니다. 샤넬은 1883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샤넬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 같지만,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샤넬이 태어난 것에 관심도 없었고, 어머니는 일찍이 병에 걸려 그녀가 어린아이일 때 사망했습니다. 이후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자 샤넬은 수녀원으로 보내집니다. 그녀는 수녀원에서 7년 동안 바느질을 하면서 해당 실력이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더불어 수녀원에서 보고 자란 수녀복,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훗날 샤넬의 디자인에 엄청난 영감을 주기 시작합니다. 이후 그녀는 성인이 되어 수녀원을 나와 낮에는 봉제회사를 다녔고, 밤에는 카페에서 가수로 활동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경험들 또한 훗날 샤넬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밤에 다녔던 카페에서 그녀의 애칭은 ‘코코’였다고 합니다. 훗날 이 애칭은 코코 샤넬의 앞 글자를 따 샤넬 로고 CC를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이 당시 에드워드 카펠이라는 남자를 만나 첫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 남자의 애칭은 ‘boy’였는데, 이는 훗날 샤넬의 대표 가방 ‘Boy Bag’의 탄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샤넬은 처음엔 카펠의 도움을 받아 파리의 깜봉 거리에 첫 모자가게를 열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곧 엄청난 호응을 얻게 되었고, 그녀는 자신만의 첫 브랜드인 ‘가브리엘 샤넬’을 만들게 됩니다. 참고로 샤넬이 성공한 배경을 알려면 당시 시대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샤넬이 런칭한 시기인 1913년 때만 해도 여자들의 옷은 화려하지만 거추장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동력을 요구받았던 당시 여자들은, 노동을 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당시 옷의 디자인을 단순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되었고, 샤넬은 이후 신여성의 대표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당시 화려한 색감의 드레스가 유행이던 시절에, 샤넬은 장례식장에서나 입는 검은 색상을 드레스에 적용하여 혁신을 만들어냈습니다. 나아가 패션뿐 아니라 향수와 화장품에서도 큰 혁명을 일으킨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샤넬은 승승장구하며 1935년 당시에 직원만 4천 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잠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전쟁 당시엔 판매를 전혀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샤넬은 71세 나이에 파리로 다시 돌아와 제품 개발에 다시 매진합니다. 이때 나온 제품들이 60년이 넘게 매해 색상만 바꿔 우려먹고 있는 트위드 자켓과, 샤넬의 대표 가방이라고 할 수 있는 2.55백입니다. 70이 넘은 나이에 복귀한 샤넬은 자신의 브랜드 샤넬을 완벽하게 재기시킵니다. 그리고 파리에 돌아온 지 16년 후, 샤넬은 8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이후 샤넬의 빈자리를 천재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차지하게 됩니다. 그는 현재의 샤넬을 있게 만들어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 라거펠트는 1933년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옷에옷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옷을 만져보면 해당 옷이 대략적으로 언제 만들어진 옷감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9살이 된 후에 패션의 중심인 파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패션에 대한 천재적 재능을 바탕으로 파리에 온 지 약 2년 만에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디자인 대회에서 코트 부문 1위를 거머쥡니다. 이로 인해 당시 최고 브랜드였던 BALMAIN의 거장 피에르 발망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실 그의 패션 디자인은 혹평 못지않게 악평도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자신의 실력을 쌓아 올려, 1963년에 그는 독립을 선언하여 프리랜서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프리를 선언한 지 1년 만에 끌로이의 디자인팀에 합류하고, 다음 해엔 펜디의 디자인팀에도 합류합니다. 그리고 칼 라거펠트는 예술성과 고급스러움에 치중한 당시 옷들에 환멸을 자주 느꼈고, 이 때문에 좀 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선호하는 대중적인 옷을 만들기로 다짐합니다. 마침내 1982년, 세계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발표가 이루어집니다. 바로 샤넬의 칼 라거펠트 영입입니다. 물론 내외부적으로 해당 영입에 대한 반대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가 독일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샤넬 소유주들은 샤넬의 위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올드해진다고 판단하여 승부수로 칼 라거펠트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합니다. 이후 1983년 1월, 첫 샤넬의 컬렉션 무대를 선보인 그에게 언론들은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며 극찬을 했습니다. 샤넬의 시그니처가 샤넬의 로고, 트위드 슈트, 까밀리아, 퀄팅백 등은 모두 그가 창조한 작품들입니다. 그는 젊은 세대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감각으로 바꾸지만, 소재는 프랑스에서도 하이엔드 공방에서 공수받는 최고급으로만 사용해 젊은 감각의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샤넬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칼 라거펠트와 펜디도 함께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안타깝게도 2019년, 85세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해당 빈자리는 그의 오른팔이었던 비르지니 비아르가 선택되어 지금의 샤넬을 이끌고 있습니다.

DND VIDEO : https://www.youtube.com/channel/UCUCGcag0CwDoFKbPluG8FyQ
DND PACS 관련 정보 : https://dndnews.co.kr/%ed%94%84%eb%9e%91%ec%8a%a4-pacs-%ec%a0%9c%eb%8f%84-%ec%a7%91%ec%a4%91-%ed%83%90%ea%b5%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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